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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일상

그윽하게 거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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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1569~1618)의 시를 하나 감상해본다.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라 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비롯해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수시화(惺叟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지면상 생략하기로 하고 관심이 있는 분들은 http://kenji.cnu.ac.kr/gyosan/를 방문하시면 많은 자료를 얻으실 것이다.

 

 

 

幽居無物入淸談(유거무물입청담) 그윽하게 거(居)하매 청담(淸談) 아닌 것이 없어

坐占煙霞興不堪(좌점연하흥불감) 안개노을 깔고 앉으니 그 흥겨움 이기기 어렵네

蘿月照時形散百(나월조시형산백) 넝쿨에 걸린 달 은은히 비치니 사물의 모습 흐릿해

松風來處逕開三(송풍래처경개삼) 뜰에 솔바람 불어와 세 가닥 길을 겨우 열었네


溪環草屋喧鳴瀨(계환초옥훤명뇌) 여울은 초가집 둘러 졸졸졸 흐르고

岫擁柴門滴翠嵐(수옹자문적취남) 사립문 에워싼 뫼에 푸른 안개 젖어드는구나

樽裏幸存陶令酒(준리행존도령주) 술통 속에 다행히 술이 남아있어 詩興 오르니

未妨吟嘯倚微酣(미방음소의미감) 슬쩍 취하여 읊조리고 휘파람 불어대도 헤살(방해)하지마소


牕下瑤棋可手談(창하요기가수담) 창 아래서 옥돌 들고 바둑 두어봄 직도 한데

耳喧人謗聽難堪(이훤인방청난감) 귀 시끄러운 비방소리 차마 듣기 어려워라

時拈易掛推初九(시염역괘추초구) 이따금 괘 잡아 초구(初九) 효(爻)도 추산해 보며

或把禪經究後三(혹파선경구후삼) 혹은 좌선에 힘쓰고 불조삼경도 천천히 궁구해 보네


掀枕石泉鳴玉溜(흔침석천명옥류) 샘물소리 옥 굴리듯 떨어져 울려 잠을 깨우고

入簷眉岫鎖紈嵐(입첨미수쇄환남) 처마 끝에 어려보이는 뫼에 뿌연 안개 에워싸이네

幽居至味同啖蔗(유거지미동담자) 그윽하게 지내는 것은 사탕수수 씹는 맛과 같으니

佳境逢來興逾酣(가경봉래흥유감) 좋은 경치 만날수록 흥겨움은 더욱 이네


養生爲論豈高談(양생위론개고담) 양생을 말하는 것이 비록 고담일지라도

如我還存七不堪(여아환존칠불감) 나처럼 집밖에 안 나서고 돌아와 있을 일이지

鷦翼僅容林處一(초익근용임처일) 뱁새는 숲 속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狙公纔足暮餐三(저공재족모찬삼) 저공은 저녁에 세 알 주어 만족케 한 재주 있었네


閑聽翠□生靈籟(한청취구생영뢰) 맑은 퉁소 소리같은 물총새 울음소리 듣는데

靜愛蒼巒引彩嵐(정애창만인채남) 고요함은 푸른 뫼를 어여삐 여겨 안개 드리우네

世事浮雲曾慣識(세사부운증관식) 세상일이 뜬 구름 같은 것을 일찍이 알았는데

此身寧醉利名酣(차신영취이명감) 이 몸이 어찌하여 명리에 도취되랴

 

용어 및 고사


1. 유거(幽居) : 그윽하게 산다는 것이니 은둔(隱遁)의 삶을 말한다.


2. 나월(蘿月) : 덩굴에 걸린 달

   - 송풍라월(松風蘿月)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덩굴에 걸린 달.

   - 서산대사가 쓴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나월(蘿月)은 이백(李白)의 시「증숭산초

     련사(贈嵩山焦鍊師)」"나월괘조경(蘿月挂朝鏡), 송풍명야현(松風鳴夜弦)"에 나

     오는데, 그 注에 “등라간적월색(藤蘿間的月色)”<이백전집교주휘석집평(李白全

     集校注彙釋集評)>이라 하였음.

   - 몽라파월(蒙蘿把月)이란 선시(禪詩)의 한 구절에 전거한다는 설도 있음.

      (북한산 나월봉(蘿月峰)과 반달)


3. 삼경(三逕) : 은자(隱者)의 문 안에 있는 뜰. 또는 은자가 사는 곳. 한(漢)나라 때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고 제멋대로 하자 당시 연주자사(兗州刺史)였던 장후(蔣詡)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두릉(杜陵)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외부와 통하는 오솔길 세 가닥을 터놓고 거기에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었다 한다. 또 그 길 하나는 자기가 다른 두 길은 구중(求仲)ㆍ양중(羊仲) 두 사람만이 왕래하였다는데서 유래한다. 三徑(삼경)이라고도 함.


4. 도잠(陶潛) : 도연명(陶淵明)을 이른다. 그의 벼슬이 현령(縣令)이어서 도령(陶令)이라 함. 도잠의 술이라고 했으므로 주흥(酒興)에 더불어 시흥(詩興)이 일어난다는 말일 게다.


5. 초구효(爻) : 주역 건위천(乾爲天) 초구(初九)는 ‘潛龍勿用 陽在下也’로 은인자중해야 됨을 말함.


6. 삼경(三經) : 불조삼경(佛祖三經)을 지칭.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 불유교경(佛遺敎經), 위산경책(潙山警策) 이상 세 책을 합철


7. 칠불출문 팔불귀가(七不出門 八不歸家)에서 기인한 듯. 외출을 삼가는 뜻.


8. 저공(狙公) : 조삼모사(朝三暮四) 고사의 주인공

 

 


허균의 은둔자적인 삶에 대한 갈망 


교산은 정치적 굴곡을 제법 겪고 살았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학문으로 인해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유불선 삼교에 두루 능통했다고 한다. 따라서 과묵한 유자들의 고루한 시선으로는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인품이 경망스럽다는 것이 탄핵의 주된 이유였다. 때로는 여색을 지나치게 밝힌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이것을 보건대 그는 유가적 가치관을 넘어선 그 어떤 자유를 구가하며 살았던 것 같다.


이 시를 통해 그의 도가적(道家的) 은둔(隱遁)에 대한 갈망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톺아놓은 시를 통해 그것을 못 느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재주가 얕음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기꺼이 질정을 받고자 한다.


이제 단소로 연주하는 <청성곡> 동영상을 하나 올린다. 음악감상과 함께 그의 시를 되씹어보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韻致)있을 것이다. 마음이 閑하여오는지 시험해 볼 일이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qseqCFbWQ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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